제노그래픽 프로젝트(IBM+내셔널지오그래픽; 2005년~2019년)는 전 세계에서 기증받은 DNA 샘플을 통해 인류의 이동 경로를 과학적으로 재구성했다.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서 탄생한 현생 인류는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가는데, 한반도에는 약 5만년 전쯤 도착한다. (출처: IBM 리서치, 재인용 출처: 주간조선)

19세기 유럽 고고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로니아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유물들을 발견했다. 기존에 알려졌던 바빌론과 앗시리아보다 더 오래된, 이들과 전혀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비로소 드러났다.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Sumer) 문명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에서 무리지어 살던 이들은 느슨한 연맹체를 이뤘다. 농업 생산량이 폭증하기 시작하면서 공동관개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촌락도 생겨났다. 특히 우룩(Uruk)우르(Ur)는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상당히 컸다.

농경이 발전하면서 수확한 곡물과 가축을 사고파는 거래도 점차 활발해지고 복잡해졌다. 예컨대 보리와 양 또는 염소와 귀리를 교환해야 할 일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상품들을 일관성 있는 가치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교환 과정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수메르인들이 찾아낸 해법은 바로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젖은 점토판을 눌렀을 때 생기는 쐐기모양 홈을 이용해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머지않아 인류 최초의 문자로 발전한다.

최초의 문자 탄생

하지만 처음에 수메르인은 자신이 발명해낸 문자 언어의 잠재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참배자가 신전에 올린 올리브기름 단지가 몇 개인지, 제물로 바친 숫양이 몇 마리인지 기록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머지않아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혁신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만든다. 글씨를 ‘찍어내는’ 일을 하는 필경사들은 매우 영향력이 높은 계급으로 부상했고, 도시가 번성하면서 이들의 위상도 함께 커졌다.

기원전 2,300년쯤 수메르는 북방에서 내려온 아카드인에 의해 멸망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이 발전된 문화를 거의 그대로 물려받는다. 하지만 수메르인과 언어가 달랐던 그들은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그대로 쓸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자신들의 언어에 맞게 고쳐썼는데, 이 과정에서 그림을 모방하는 상형 요소는 상당 부분 제거되고, 소리를 표시하는 ‘표음’ 기능이 대폭 강화된다.

여신들의 세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문자까지 발명하며 인류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은 무수한 신들을 상상해냈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 신들 모두 여신이었다.

특히 수메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은 이난나(Inanna)였다. 쉬지 않고 세상을 모험하며, 하늘의 권좌에 앉아 판결을 내리고 인간의 운명을 다스린다. 이난나의 토템(totem; 원시사회에서 신성시하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은 올빼미로 지혜를 상징한다. 이난나는 이후 무수한 여신의 원형이 된다.

수메르인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들도 혼인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난나의 배우자는 두무지로, 겨울이 오면 죽었다가 봄이 오면 이난나가 다시 살려낸다. 매우 활동적인 이난나에 비해 두무지는 매우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 이난나는 가정을 돌보는 의무를 전혀 지지 않고 젊은 남자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봄이 되어 다시 되살아난 두무지와 이난나의 합방(‘히에로스 가모스’; Hieros Gamos; 신성 결혼; 성스러운 성의식; 여신과 남신의 성교 혹은 그것을 재연한 의식)은 풍요로운 결실을 얻기 위한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다. 히에로스 가모스는 곧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여겨졌기에, 수메르인들은 봄마다 히에로스 가모스를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례로 여겼다.

이 때 가장 상징적인 의식은, 수메르의 왕은 두무지 역할을 하고 백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지닌 여성을 이난나로 간택하여 첫날밤을 치르는 것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이러한 의례가 풍작을 가져다주며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산할 수 있는 행운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이 의식을 잘 치러야만 왕으로서 통치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수메르에서는 여신들이 높은 지위를 누렸던 만큼 여자들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사회 전반에 여성적 지혜가 존중받았다.

아카드 창세 신화와 어머니 살해 

수메르를 무너뜨린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의 신화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수메르 문명을 무너뜨리고 500년 쯤 지났을 때 아카드의 성직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수메르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아카드의 창세 신화는 이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대제국들의 창세-건국신화가 되어 이후 1,000년 동안 매년 봄마다 암송된다. 결국, 아카드인들의 창세 신화는 성경을 비롯하여 서양 문명을 관통하는 원형적인 신화로 자리잡는다. 아카드-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고의 여신 티아마트(Tiamat; 바닷물)이 존재했다. 티아마트은 세상의 근원을 상징하는 어머니 여신으로 신 중의 신이다. 그녀의 본질은 바다의 소금물로 흔히 인간의 모습이나 바닷뱀 모습으로 현현한다.

어느날 티아마트의 자궁에서 젊은 신들이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그들의 떠들썩한 파티는 티아마트을 곤혹스럽게 했고, 티아마트의 배우자 압수(Apsu 또는 Apzu; 민물)도 화가 났다.

잠도 못 자고 며칠 밤을 고생하던 압수는 젊은 신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티아마트에게 말한다. 티아마트은 압수를 나무라며 아직 어린 놈들이라 그런 것이니 좀 봐주자고 설득한다.

문제가 지속되자 결국 티아마트과 압수는 격렬한 부부싸움을 한다. 천둥처럼 울리는 싸움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젊은 신들은 결국 압수를 살해해버린다.

압수가 죽은 자리에서 마르두크(Marduk)라는 신이 태어난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았던 마르두크는 바람을 이용해 티아마트의 바다에 격랑을 일으킨다. 뱃속에서 난장을 피우는 젊은 신들도 신경쓰이는데, 폭풍까지 몰아치니 티아마트은 더는 화를 못참고 마침내 뱃속의 젊은 신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티아마트 뱃속에 있던 젊은 신들은 겁에 질린다.

티아마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신은 없다. 티아마트과 맛서는 순간 그 어떤 신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완전히 성장한 마르두크가 티아마트에 맞서 자신이 대신 싸우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이 티아마트를 이기면 자신을 최고 신으로 섬길 것을 젊은 신들에게 요구한다. 계약은 성사된다.

티아마트는 마르두크를 비웃는다:

“몸에 맞지도 않는 바지를 입고 있는 꼴 좀 봐라.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사실상 티아마트의 아들인 마르두크는 이렇게 답한다:

“몸집만 크면 다냐? 재수 없다!” 

마침내 엄청난 싸움이 벌어진다. 다른 신들은 움츠린 채 숨죽이고 지켜보기만 했다.

싸움은 예상대로 티아마트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다 죽어가는 마르두크를 티아마트가 삼키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마르두크는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바람과 폭풍의 신이었던 마르두크는 티아마트 입속으로 소용돌이 7개를 일으켜 집어넣는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소용돌이로 인해 티아마트의 배는 크게 부풀어 올랐고, 갑작스럽게 커진 배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정신을 차린 마르두크는 티아마트의 배를 향해 재빨리 활시위를 당긴다. 부풀어 오르던 배가 터지고 심장이 쪼개졌다. 마르두크가 승리한 것이다.

마르두크은 티아마트의 거대한 시체를 앞에 놓고 그녀의 사지를 절단하여 우주를 창조한다. 그녀의 엉덩이는 산이 되고 그녀의 젖가슴은 언덕이 되었다. 또, 창으로 그녀의 눈알을 찌르자 안와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는데, 이것이 두 개의 거대한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젖가슴을 여기저기 찔러 두 강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지류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어머니의 봉긋한 음부로는 하늘을 떠받치게 만든다.

마르두크는 티아마트과 동맹 관계에 있던 신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신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티아마트가 사라진 뒤 제사 지내는 이들이 줄어 자신들의 생활이 빈곤해졌다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리자 마르두크는 모든 사건의 원인킨구(Kingu)에게 있다고 떠넘긴다. 킨구는 티아마트와 압수 사이에 낳은 자식 중에서 티아마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압수가 죽은 뒤 티아마트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던 신이었다. 킨구가 모든 권력을 혼자 누리기 위해 어머니 티아마트를 죽이라고 자신을 부추겼다고 모함한다.

마침내 마르두크의 모함은 성공하여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킨구를 살해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티아마트을 죽이는 데 공모한 모든 이들의 죄책감을 그에게 덮어씌우고 그를 공개처형한다. 마르두크는 자신의 아버지 에아(Ea)에게 이 불운한 희생자의 살과 피를 반죽하라고 명령한다. 에아는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듯, 킨구의 피로 물든 고깃덩어리로 무수한 인간들을 빚어낸다.

마르두크는 이 보잘것 없는 피조물들에게 티아마트의 사체 위를 기어다니며 살아야 하는 운명을 부여한다. 이로써 인간들은 짧은 시간을 살면서 열심히 일하여 신에게 음식과 포도주를 갖다 바치도록 한다.

여성혐오와 죄의식

문자로 기록된 이 최초의 창세 신화는 수메르라는 유구한 문명을 무너뜨린 아카드인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 창세 신화에 여성혐오와 잔인한 폭력이 깊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배가 부풀어오른(=임신) 엄마를 살해하고, 그 육신을 토막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이 신화는 더 나아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준다. 우리 인간 자체가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받고 죽임을 당한 위대한 여신의 아들 킨구의 순교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은, 이 신화가 이후 모든 서양 문명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하늘신(God)이 혼돈 괴물(Chaos Monster: 대개 뱀이나 용으로 형상화)를 죽이고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이후 서양 문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웅 서사가 된다.

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Share.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