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파벳과 여신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에서 수메르 문명이 출현하는 시기에 나일강 유역에서도 또 다른 문명이 출현한다. 바로 이집트 문명이다. 에디오피아에서 발원하는 나일강은 매년 우기마다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내려와 강이 범람하는데, 이렇게 강물에 잠기는 지역은 물이 빠지고나면 비옥한 진흙밭으로 변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엄청난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이다.
독수리 여신(네크벳)과 코브라 여신(와젯)
기원전 3,100년 경 수메르인이 젖은 점토판에 뾰족한 막대를 찍어서 쐐기문자(cuneiform)를 발명해냈을 무렵, 이집트인은 그림으로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바로 상형문자(hieroglyph)다.
추상화된 기호를 글자로 사용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 구체적인 그림을 글자로 사용하는 이집트 문명은 훨씬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어떤 창세신화도 여신을 난도질하는 아카드의 창조신화(에누마엘리시)보다 잔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집트의 가장 오래된 창세신화에 따르면, 상류 이집트에 사는 독수리 여신 네크벳과 하류 이집트에 사는 코브라 여신 와젯이 혼돈 속에서 나와 세상을 만들어내고 나일강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살아가도록 창조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네크벳과 와젯 모두 ‘여신’이라는 사실이다.
독수리(vulture)는 오늘날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고대 이집트인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동물의 사체를 먹고 사는 독수리는 죽음을 앞둔 동물 머리 위에서 맴돈다. 이는 반대로, 어떤 동물 머리 위에서 독수리가 맴돌면, 그 동물은 머지 않아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집트인은 독수리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다고 믿었다.
독수리가 죽음을 상징하는 반면, 뱀은 생명을 상징한다. 서양에서 뱀은 오랫동안 사악함과 유혹의 상징이었지만, 문명의 여명기에는 여성적 에너지를 지닌 긍정적인 표상이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뱀의 모습은 혼기에 찬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 또는 춤추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섹스를 할 때에도 남자의 기계적인 피스톤운동에 비하면, 여자의 움직임은 뱀과 비슷하다.
또한, 뱀은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세 가지 이미지와 닮았는데 구불구불 흐르는 강, 나무와 식물의 뿌리, 포유동물의 탯줄이다. 어머니·양육자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데 ‘탯줄’만큼 적당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태반의 구불구불한 혈관에서 뻗어 나온 탯줄을 보면 뱀이 생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뱀은 땅의 틈새나 균열부에 살며 어머니 대지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고 새롭게 시작하는 뱀의 행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피조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이로써 부활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뱀은 지혜를 상징한다. 뱀의 눈은 신비로운 예지력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통로다.
이시스: 생명(여성성)으로 죽음(남성성)을 이겨내다
하지만 중왕국시대(BC 2,040-1,600)에 들어서면서 이집트에서도 남성적 원리의 창조신화가 인기를 얻으며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남성의 권력이 부각된 창세신화 중 하나로 아툼(Atum)이 자위를 하여 정액을 내뿜었고, 여기서 8자녀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툼까지 포함하여 이들 아홉 신을 엔네아드(Ennead)라고 하는데, 이들 신성가족이 세상을 창조한다. 아툼 신화는 네크벳과 와젯이 함께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화가 나온 뒤 1,500년이 지난 뒤 생겨났다.
엔네아드 아홉 신은 제각각 자연의 중요한 힘을 대표한다. 그중 하늘의 여신 눗(Nut)과 대지의 신 겝(Geb)이 교미하여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고 거기에서 살아갈 생명을 만들어낸다. 눗과 겝은 세 자녀를 낳는데, 첫째 딸 이시스(Isis)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풍요의 여신이다. 신성한 강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검은 땅을 상징하는 이시스는, 인간에게 농경 기술을 전해준다. 둘째 아들 오시리스(Osiris)는 강의 신으로, 누나 이시스와 연인이자 부부관계를 맺는다. 잘생기고 남자다운 오시리스는 만인의 추앙을 받았다. 셋째 아들 세트(Seth)는 오시리스를 질투한 사악한 동생이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질투하여 죽인 뒤 시체를 갈가리 찢어 숨겨놓는다. 슬픔에 빠진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유해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유해를 찾아낸다. 이시스는 유해를 배에 싣고 이집트로 돌아와 그를 다시 살려낸다. 이로써 이시스는 대지는 물론 생명까지도 부활시킬 수 있는 여신이 된다. 결국 여성적인 사랑이 남성적인 죽음을 이겨낸 신화라 할 수 있다.
오시리스가 부활하는 매년 봄에는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종교예식이 열린다. 물론 가을이 되면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죽은 자들의 왕 노릇을 하며 살아야 했다. 이 와중에, 신화의 몇몇 판본에 따르면 남자의 정액을 받지도 않고(동정녀 신화) ,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Horus)를 낳는다. 이시스는 대부분 어린 호루스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나중에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조각상(피에타; Pietà; 슬픔, 비탄)의 원형이 된다.
호루스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인간과 신들 사이를 중재했다. 이 시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자신이 호루스의 현현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균열: 힉소스의 등장과 축출
남신과 여신들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시대를 누리던 이집트에도 마침내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기원전 1,700년경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집단이 동쪽 사막에서 쳐들어와 하류 이집트와 중류 이집트를 정복하고 150년 동안 지배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침입자들을 가나안에서 내려온 셈계 힉소스(Hyksos)라고 추측한다. 힉소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
150년 뒤 이집트는 힉소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신왕국시대(BC 1550-700)를 시작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한껏 받은 이집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예컨대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2세와 같은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서는 군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장엄한 기념물을 세웠다.
또한, 신왕국의 필경사들은 상형문자 대신 신관문자(hieratic script)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소리를 표기하는 추상적인 문자였다.
투트모세 3세: 아몬 신의 격상과 ‘보이지 않는 신’
신의 질서에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신왕국 초기 투트모세 3세는(BC 1,490-1,426) 남신 아몬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고, 신들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만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몬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집트 전통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개념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여신의 지위도 크게 변한다. 초기 왕조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네크벳(독수리), 와젯(코브라), 눗(하늘), 하토르(암소)와 같은 신들은 모두 출산, 다산, 아이들의 수호자였다. 중왕조에서는 자연의 순환을 신격화한 이시스가 여성성, 다산성, 모성의 상징이었다. 반면 신왕국시대에 와서는 이전에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던 한 여신을 발굴해 최고의 여신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형상이 없는 신의 등장 못지않게 매우 놀라운 사건인데, 왜냐하면 이 여신은 자연과 무관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진리’의 여신 마앗(Maat)이다. 마앗은 원래 무수한 다산과 자연의 여신 중 하나였지만, 새로 정립된 마앗의 상징은 법, 진리, 질서,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였다. 마앗은 죽은 이의 심장을 정의의 저울 한쪽 접시에 올려놓고 반대쪽 접시에 자신의 타조 깃털을 올려놓아 죽은 자의 도덕성을 쟀다.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면, 저울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어느 신의 연인도 아닌, 자웅동체의 신으로 묘사되었다.
유일신 아톤: 아톤 숭배자 아멘호테프 4세 혹은 ‘아크나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변화에 발맞춰 이집트는 서서히 가부장제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왕국의 18대 왕조에 지극히 기괴한 파라오가 등장하여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는 어릴 때는 병약했으나 운 좋게도 10대에 이집트 최고의 권좌에 오른다. 그는 사냥, 전쟁,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이집트의 종교와 문자 체계를 개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젊은 지배자는 아몬 숭배를 경멸했다. 당시 성직자들은 과도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집트의 만신전을 뒤엎는다. 그는 먼저 아톤(Aton)이라는 무명의 신을 최고 신으로 격상시킨 뒤 신하들에게 아톤만을 섬기라고 명령한다. 아톤은 경쟁자 아몬처럼 이미지가 없다. 하지만 아몬보다 훨씬 숭고하고 강력한 신으로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전통을 완전히 단절하고 싶어했던 아멘호테프 4세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 아톤에 복종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을 아크나톤(Akhenaton)으로 바꾼다. 또한, 기존의 신을 믿는 사람은 모두 처벌한다. 일반인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던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앙도 금지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풍요로운 종교의례와 신앙을 거의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형상 없는 신에 대한 믿음을 대중에게 설득할 수 없다는 불평에 아크나톤은 결국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상징하는 텅 빈 원으로 아톤을 표시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또한, 아톤이 마앗을 배우자로 선택했다고 밝힘으로써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기도 한다. 이전의 신화와 연관된 장식, 맥락, 형상이 모조리 사라지고 이제 텅 빈 원에서 뻗어 나오는 직선과 빈약한 신관문자로 쓰여진 찬송가만 남았다.
고대로부터 창조성의 배출구 역할을 하던 종교 예술이 완전히 금지되자, 역설적으로 고차원적인 예술이 만개한다. 아크나톤 부부의 흉상이나 예배하는 모습,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들을 보면 이 시대 예술이 이집트 역사상 정형화된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유일한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년간 이어진 아크나톤의 철권통치 이후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은 아크나톤의 종교혁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의 부추김 속에서 아톤 숭배의식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기존의 관습을 복권한다. 역사학자들은 아크나톤을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 숭배자라고 평가한다. 물론 아톤에게 드리는 예배에 마앗이 늘 함께 등장했기에 완벽한 일신교는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 유래 없는 여성 상위시대
이러한 와중에도 고대 이집트는 인류 역사상 여자들이 가장 높은 지위와 권리를 누렸던 문명으로 남았다. 여자의 행동에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여자들은 공공장소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를 혼자 활보할 수 있었고, 무역이나 생산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인 디오도로스 시쿨로스(Diodorus Siculus)는 ‘이집트에서는 결혼 서약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순종을 맹세한다’고 기록했다.
이집트 왕족들이 남매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던 이유 역시, 상속 때문이었다. 이집트에서는 대부분 재산을 어머니가 딸에게 상속했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여자가 주도권을 차지했다. 이집트의 연애시나 연애편지를 보면 대부분 남자가 여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쓴 것이다. 여자가 먼저 만나자고 하고, 구애하고, 청혼했다.
“이집트인처럼 사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곳에서는 남편이 집에서 베를 짜고, 아내가 밖에 나가 일용할 빵을 벌어온단다.”
—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들에게 하는 말
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