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1일 기자협회 등이 주최한 대선후보 TV토론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는 미국 저널에 실린 칼럼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펼쳤다.
이재명 후보가 윤 후보의 국제관계 인식을 비판하면서 한 칼럼을 언급했고, 윤석열 후보는 “그 저자는 국제정치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하는 분으로 유명한 분”이라며 칼럼니스트의 신뢰도를 문제 삼았다. 해당 칼럼니스트는 다음날 노컷뉴스에 윤 후보의 발언에 대한 반박문을 보내왔다(CBS노컷뉴스, ‘윤석열에 봉변당한 미국교수 “팩트체크해 알려달라”’).
한국 대선후보 ‘어제’ 발언, ‘오늘’ 반박한 미국 교수
해당 칼럼은 ‘더 힐(THE HILL)’이라는 매체에 2022년 2월 9일(현지 시각) 업로드된 최승환 교수의 ‘전쟁의 가능성이 한반도 위에 드리우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1 ‘더 힐’은 미국 정치뉴스 매체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읽히고, 트위터에 언급되는 정치뉴스 정보원으로는 폭스(The Fox), 씨엔엔(CNN)에 이어 세 번째를 차지하는 독립 보도 매체다(출처: 미디어포스트).
최승환 교수는 미국 시민권자로 2004년부터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시카고 대학교) 교수였고, 현재 이 학교 종신교수로 있다. 2021년 한 해만 각종 저술이나 논문 등에 278회나 인용된 바 있는 저자로(구글스칼라 기준), 세계 국제정치학계에서는 결코 ‘인정받지 못하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아니다.
이 사건에서 학계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윤 후보의 과감한 발언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대선후보의 발언이 실시간으로 세계에 소통되는 환경이다. 11일 토론회 발언에 대해 12일 반박문이 도착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는 우리나라 밖의 정보가 국내용으로만 소통될 수 없는 시대가 된 지는 오래되었다. 게다가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계 ‘선진국’으로의 관점과 판단,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어느날 갑자기, 선진국 대한민국
선진국(先進國)이라는 말은 ‘advanced country’의 번역어로, 특정 시간대를 ‘먼저 가고 있는 국가’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세계 사회에서 국민국가 혹은 국가공동체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자의 몫이다. 대한민국 구성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외부자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보인다, 혹은 선진국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에서 승진을 하면 당장은 소득이 늘어나고 기분이 좋지만, 그만큼 책임이 커지고, 잘못한 경우 불이익도 비례해서 커지듯이, 세계 사회에서 선진국으로 대우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지위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건 결코 아니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세계사회 주체들의 인식에 급격한 전환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K-팝’, ‘K-드라마’, ‘K-영화’ 등 문화적 차원에서의 급부상이나 ‘K-방역’, ‘K-무기’ 등이 국가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분명 우리나라 기업이나 시민의 경제적 가치를 높여줄 뿐 아니라 자긍심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세계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도 급격히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가?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이사회는 대한민국을 비선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이 기구는 1964년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 증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연합(UN) 산하 정부 간 기구다.
2021년 현재 총 195개국이 가입되어 있는데, 가입 국가들은 A, B, C, D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이 중 B그룹은 선진국 그룹이고, 나머지 3개 그룹은 소재 지역을 중심으로 아시아·아프리카(A그룹), 중남미(C그룹), 러시아, 동구(D그룹)로 나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64년 설립 시점부터 가입국이었고, A그룹으로 활동해왔는데, 2021년 B그룹에 편재된 것이다. 기구 설립 이래 A, C, D그룹 소속 국가가 B그룹으로 변경된 건 우리나라가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다. B그룹이 되었다는 것은, 나머지 그룹 국가들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증진을 지원’해야 할 책임을 다른 B그룹 소속 국가들만큼 져야 한다는 의미다. 직접 원조이든 기술 지원든 간에 말이다.
2021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영국에서 개최되는 G7(Group of Seven) 정상회의에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초대되어 참석했다. G7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로 구성된 모임으로, 세계 경제, 정치, 외교 분야의 다양한 의제들을 논의하고 공동보조를 맞추어 가는 역할을 한다. 소속 국가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의장을 하는데 작년 의장국이 영국이었고, 의장국은 기본 구성 국가 외에 추가로 초대국을 선정할 권한을 갖는다.
이전에도 한 번 초대된 적이 있긴 하지만, 2021년의 초대는 다르다. G7은 세계사회 현안에 대한 소속 국가들의 공동보조만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자 역할을 해왔고, 현재 G7은 좀 더 확대된 질서로 재편을 모색 중인데 어떤 구상으로 귀결되는 한국은 새로운 체제의 상수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된다는 것은,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세계 경제와 안보질서의 재편에서 끊임없는 발언을 요구받을 뿐 아니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2021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영국 글래스고에서 개최된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한국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계획을 공표했다. 현재 한국정부가 공표한 안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의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기업구조나 에너지 전환 준비 상황을 볼 때, 이 목표는 지금까지 한국사회나 정부가 상상해본 적이 없는 거대한 변화를 수반하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 안은 현 정부가 특별히 기후위기에 민감해서 나온 게 아니다. 미국,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의 심각한 압박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에 가까웠다.
‘파리협정’(2015) 체제2에서 세계 각국, 특히 선진국들은 점점 더 큰 기후위기 대응 노력을 요구받고 있다. 대한민국은 ‘파리협정’ 이전까지 기후위기 대응 국제협약에서 선진국에 준하는 의무를 부과받지 않았으나, 파리협정 체제에서 그 지위는 완전히 바뀐 상태다. 앞으로 기후위기 대응체제는 더 강력해질 수밖에 없고 한국 사회도 점점 더 큰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선진국에 걸맞는 국민, 대선, 후보, 정치와 정부
세계 질서는 국제연합 등 다양한 국가 간 기구(GO), 비국가 기구(NGO)들과 그 행위자들로 구성되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안에서 특정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해당 국가가 외부자들이 요구하는 그 역할을 담당할 것인지, 아닌지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대개 그렇지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기업과 국민들이 다양한 이해관계로 엮여있는 세계 사회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 체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탄소배출 감축에 얼마나 적극적이어야 하는가의 기준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세계에서 국가 간 원조(ODA)를 얼마나 감당해야 하는가의 수준 역시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국제 분쟁에서 평화유지활동(PKO)에 어느 정도의 병력과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가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에서 평화 유지 여부가 세계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이전보다 훨씬 커졌고, 지역안보체제에서 한국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지고 있다. 세계 정치경제 질서에서 동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의 중요성은 점점 더 증대하고 있고, 이 지역의 경제질서나 안보질서를 누가, 어떻게 디자인해나갈 것인가는 미국과 중국 등 세계 패권 국가들의 핵심 의제가 된 지 오래다.
5천만 국민 모두가 이 어려운 의제들을 속속들이 알고 입장을 가져야할 필요는 없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점점 무거워지는 책임을 감당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기업과 국민이 피해를 본다. 급변하는 세계 사회에 대해 선제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미묘하고 섬세한 국가 간 관계에 대한 감각과 정보를 가져야 하며, 실시간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각종 글로벌 이슈에 대한 한국 정부의 판단과 대응이 국내정치의 갈등요소로 전환되지 않도록 친절히 설명하고 설득할 능력까지 필요하다.
선진국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지구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계사회 행위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5천만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도의 감각과 능력을 가진 정치와 정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은 이런 정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외교와 통상을 담당하는 기관은 5천만의 이익 관점에서 세계 사회 행위자들과 소통하고 협상할 능력을 가져야 하며, 국방과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진 안보 환경을 읽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행정부 수장과 국회 원내정당들은 이런 정부기관을 감독하고 이끌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5천만 시민의 과제는 이런 정치와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거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듣고 계신가요? 후보자의 말이나 의혹에 대한 기사는 쏟아지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정책과 무관하거나, 무분별한 의혹 제기 기사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거, 대선을 앞두고 과연 무엇을 검증해야 하는지, 유권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게임의 룰은 문제가 없는지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꼼꼼히 파헤쳐보는 대선 [유권자의 스케치북] (유스케)을 연재합니다. 이번 슈스케 칼럼 필자는 서복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입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 유스케(유권자의 스케치북)
필터 버블과 팬덤 정치: 대선 후를 더 우려하는 이유 (유성진,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교수)
2022 대선은 2030이 결정한다 (ft. 2030 공약 비교) (조원빈,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의 ‘제한 정부’, 유럽의 ‘50%+1’ 원칙이 주는 교훈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대선 3분 가이드: 꼭 확인해야 할 세 가지 공약 (무권자 J 씨)
제20대 대선과 지방 소멸의 위기 (이소영, 대구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비호감 대선: 선거제 개혁이 필요한 이유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청년 공약, 세대 갈등과 젠더 갈등을 넘어서 (장선화, 대전대 글로벌문화컨텐츠학과 교수)
대통령제 개헌의 조건: 분권형 vs. 4년 연임 (이선우,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수화(손짓말)와 오스트리아 헌법 (김정환,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선진국 한국의 대선 (ft. 윤 후보의 ‘엉뚱한 분’ 발언) (서복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원문 기사, The hill, “The possibility of war looms over the Korean peninsula”↩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유지하고, 온도 상승 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 위한 국제적 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