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인사회에 기생하는 무지(無知)한 홍위병들의 모습,,,

 

“용의 꼬리 보다는 닭 대가리가 되라.” 많이 들어오던 이야기다. 큰 짐승에게 붙어 꼬리 노릇 하는 것보다는 비록 작은 짐승일지 라도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크거나 훌륭한 것 중의 말단에 있는 것보다는 대수롭지 않은 데서라도 상석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음을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이는 한국인 특유의 감투 지향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왜 감투를 쓸려고 할까? 이는 감투의 양면성 때문이다.분명 본래의 의미는 봉사와 기여의 즐거움이 크다. 반면 그 이면의 완장 욕심도 만만찮다. 후자는 다소 위험하다.소수 특혜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특권층을 유지하는 욕구도 가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며 한인들을 대변하는 회장들은 변화 되어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완장 찬 특혜 집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인사회 대표 단체의 정문은 한인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극단적으로 정문은 완장 찬 리더와 그들을 지지하고 감싸는 홍위병 집단에게 열려있다.그리고 후문은 한인들의 몫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더이상 용납되기 어렵다. 어리석은 완장들의 행동과 관습은 생각과 정신을 지배한다. 완장을 찬 기득권이 아닌 봉사자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둑은 조그마한 구멍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한인사회의 진정성과 건전성은 패거리 문화와 몰염치에 의한 비난과 비방의 비정상을 방치하는 순간부터 무너질 수 있다. 닭 대가리의 완장 찬 대리인 중심이 아닌 용의 몸통인 한인이 주인인 중심 사회로 환원 되어야 한다. 완장에 눈이 먼 비정상의 한인사회가 아닌 진정한 한인들이 주인인 정상화 된 한인사회로 탈바꿈 되어야 한다. 다만 이는 결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시간 방치하고 외면한 실체들에 대해 한인들이 스스로 적정한 관리 감독자로서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정상과 비정상을 변별할 능력이 급선무다. 이는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과 합리적 객관성의 유지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완장 찬 대리인 역시 스스로 혁신하려는 노력과 자리를 내려 놓는 실천이 병행 되어야 한다. 그간의 무거운 완장을 벗어 던지자. 그리고 충복이라는 깔끔한 새 옷으로 과감히 갈아 입어야 한다.

미주를 대표하는 미주총연이 긴 세월 진흙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과 자질도 안되는 완장에 눈먼자들이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무능력한 완장 주변에 기생하는 무지(無知)한 홍위병들 이다. 홍위병들은 냉철한 판단과 비판도 없이 무조건 완장을 감싸고 방어하며 찔끔찔끔 흘리는 꿀을 빨아 먹으며 긴 세월 공존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분쟁과 분열 속에 존재했던 완장들은 과연 한인사회를 위해 어떤 업적의 전리품을 남겼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리인으로 한인들에게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인정 받았다고 판단하는지 묻고 싶다.

미주 한인사회가 제자리에서 답보하고 있는 현실은 맹목적인 패거리 문화를 만든 무지한 홍위병들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지역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위상을 높여야 할 홍위병들이 제 역할도 못하면서 큰 물에서 놀겠다며 설쳐덴다. 무지한 홍위병들의 대부분은 지역에서 할일없는 나홀로 회장들로 끼리끼리 편을 짜서 빨대하나 꽂고 무미건조한 비방과 비난으로 시간을 갉아 먹고 있다. 문제는 무지한 홍위병들이 자신들이 아니면 미주 한인사회가 멸망한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편협된 완장들과 무지한 홍위병들을 외면하는 차세대 인재들이 생각하는 한인사회는 참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이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회색분자들이 완장을 찬 21기 민주평통 애틀랜타협의회 임원진과 고문단 구성을 보며 시니어 문화센터가 떠오르는 그림은 무엇 때문일까. 차세대 자문위원들의 자리를 빼앗으며 자문위원으로 복귀한 전직 협의회장들과 정치적 색깔도 애매모호한 시니어들이 모여 평화통일 놀이터인 고문단 시니어 문화센터를 오픈하였다. 당연히 권력을 장악한 완장이 자신을 따르고 방어해줄 홍위병들에게 직책을 나누어 챙기는 것은 일종의 “전리품 배당”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걸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자리를 챙겨주기” 위하여 너무 티나게 완장이 속한 친목 모임이나 친선 골프 모임의 패거리 그룹의 인선은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수준으로 “순리”가 아니다. 특히 평통 사무처 미주지역 담당자도 일반적으로 자문위원들은 우든 좌든 상관없이 구성될수 있다.그러나 적어도 지역을 대표하는 협의회장은 민주평통 의장의 정치적 성향과 정권의 색깔과 함께하는 진정한 보수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완장(腕章)”은 말 그대로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이다. 이 땅에서 완장의 역사는 꽤 유구하다. 봉건 왕조시대는 잘 모르겠고, 이른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래 이 완장은 만만찮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를 가르는 표지였고, 억압과 복종을 강제하는 상징이었다. 완장은 그것이 상징하는 표지대로 일종의 권력이다.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를 나누는 일종의 경계면서 나머지 일방을 강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완장은 실질적인 힘이면서도 동시에 그 힘이 가진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렇다. 완장은 바로 하수인들의 표지다. 그것은 제일 밑에서 억압과 강제를 행사하는 미관말직의 “콩 꼬투리”만 한 권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게 사람을 변화시킨다. 멀쩡한 사람도 완장을 차게 되면 매의 눈으로 이웃을 둘러보게 되며 그는 모든 금제(禁制)의 감시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학생일 때는 “주번” 완장을 찼고, 교사가 되어서는 “주감”과 “당직” 이라는 완장을 찼다. 등교 길 교문에는 노란색 바탕에 두세 개의 빨간 선으로 둘러싸인 검정 글씨로 “규율”이나 “선도’”따위를 새긴 완장을 찬 선배, 상급생들이 하급생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장이 가진 또 다른 본질은 “편 가르기” 이다. 그것은 자신과 동류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반대나 비판 세력에 대한 배척을 전제한다.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은 공존의 대상이라기 보다 절멸의 대상으로 이해되기 쉽다. 반대자들의 비판을 사회적 다원성이 아니라 통합을 저해하는 파당적 분열 행위로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완장은 권력의 일부이긴 하지만, 권력 그 자체는 아니다. 완장이 자신이 가진 힘을 지나치게 믿는 까닭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때문이다. 완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은 한시적이다. 완장이 가진 힘의 근원인 권력조차도 덧없는 일시적 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완장을 찬 그들이 하는 언행에 대해 한인들이 두려움이 아니라 연민으로 바라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완장 찬 그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며 권력과 권력에 호가호위 하는 “완장”은 얼마나 불행한가. 그런 완장에 빌붙어 맹종하며 편가르기에 앞장서는 홍위병들은 얼마나 더 불행한가.

자신의 존재감이 좁아지면 완장은 당연히 자신을 보호해 줄 아군인 홍위병을 가까이 둔다. 완장의 비위를 맞추며 무자비한 비방과 독선으로 한인사회를 좀 먹는 무지(無知)한 패거리 집단인 홍위병들이 더이상 한인사회에 존재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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