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파벳과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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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쐐기문자 기반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상형문자 기반의 이집트 문명 사이에 끼어 있는 지중해 해안 길목은 오랜 세월 서로 다른 두 문명이 교류하는 요충지가 되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이 이따금씩 충돌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는 이곳에서 놀라운 문명, 아니 놀라운 사람들이 탄생한다. 그들은 바로 기원전 1,500년 경 모습을 드러낸 페니키아(Phoenicia)다.
‘페니키아’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포이노스(phoinós)는 그리스어로 ‘진홍빛’이라는 뜻인데, 이들의 주요 수출 품목이 바로 진홍빛 염료였기 때문이다. 진홍빛은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색으로, 당시 페니키아 해안에서만 잡히는 뿔고동에서 추출할 수 있었다.
지중해의 지배자 페니키아, 알파벳을 남기고 사라지다
이방인들이 끝없이 오가는 길목이 위치한 페니키아는 지구라트(메소포타미아)나 피라미드(이집트) 같은 건축물을 짓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애착도 없었고, 농경을 멸시했다. 별다른 유물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박물관에 가보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화려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반면, 그에 못지 않게 오랜 역사를 지닌 레반트지역의 유물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이들은 이동과 교역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해안에 붙어 살았다. 해안에서 15km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오로지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더 나은 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한 선택과 집중은 놀라운 성공을 거둔다.
먼저, 레반트 지역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점을 찍듯이 여러 항구 도시들을 건설한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활용하여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어버렸다. 기원전 800년 경에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 위성 제국을 건설하였고, 유럽과 아프리카 곳곳에 식민지를 세운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해안에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의 식민지 위성제국들은 나중에는 레반트 본국보다 더 번성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자라는 백향목을 이집트에 가져다가 팔고, 그 돈으로 이집트의 특산품 파피루스를 사다가 그리스에 팔았다.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비블로스를 가져다 준다고 하여, 그들의 근거지도 ‘비블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비블로스'(Byblos)는 그리스어로 파피루스(papyrus)를 의미한다.
비블로스와 레바논 삼나무 그리고 성서
페니키아 비블로스 특산물 백향목(cedar)은 지금도 최고의 목재로 평가받는다. 백향목은 국기에도 그려진 레바논의 상징으로 ‘레바논 삼나무’라고도 불린다. 한편 비블로스(Byblos)는 이후 ‘책(biblio)’이라는 일반명사가 되었고, 이것이 ‘바이블(Bible)’이라는 말의 근원이 된다. 중세까지만 해도 ‘책’이라곤 이것(성서)밖에 없었다.
레반트 지역의 본국은 일찌기 강대국들에 의해 점령당해 멸망했지만, 이들이 세운 위성제국은 오랜 시간 번성하면서 지중해를 누볐다.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북유럽은 물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중국(!)까지 교역했다고 전해진다. 더 나아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도 교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2세기 로마에서 농경민이 세운 국가가 부흥하면서 페니키아(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대혈투를 벌인다. 120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건물 한 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고 페니키아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도 노예로 팔아버린다. 로마인들에게 페니키아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와 포에니 전쟁 그리고 토끼나라 스페인
로마-카르타고 전쟁을 로마인들은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른다. 포에니(Poeni)는 ‘페니키아(Phoenicia) 사람’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퓨닉 워'(Punic; 카르타고의, 카르다코 사람의, war)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포에니커스(Poenicus) 또는 포에니시언(Phoenician)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페니키아인은 이베리아반도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이곳을 토끼(페니키아어 sapan; 사판)가 많다고 하여 ‘토끼나라(Sapania; 사파니아)’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스페인(Spain)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결국, 페니키아는 기원전 1세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건축물이나 유물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은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불길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죽지 않는 새(불사조; Phoenix)라는 강렬한 이미지로만 그들은 기억될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류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혁명적인 발명품을 하나 남겨 놓았다. 바로 알파벳이다.
알파벳의 발명과 전파
배를 타고 다니며 진귀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페니키아인들에게는 물건의 가치와 거래 내역 등을 기록해둘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페니키아인들은 이 둘의 장점을 살려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알파벳’을 최초로 만들어낸다.
알파벳의 발명은 인류역사의 발전 방향을 바꾸어버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쐐기문자와 상형문자는 여전히 전문 필경사들만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자였던 반면, 알파벳은 누구나 쉽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자였기 때문이다. 최소 600개, 많게는 6000개나 되는 쐐기문자나 상형문자를 외워서 문법에 맞게 배열하고 읽는 것은 일반인이 쉽게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은 20개 정도 글자만 외우면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발생한 인류 최초의 문명은 일찌기 바다를 건너 서서히 전파되고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의 문명의 씨앗이 바다 건너 처음 발아한 곳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크레타(Crete)섬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최초의 유럽 문명이라 할 수 있는 크레타에 자신들이 발명한 알파벳을 전해준다. 알파벳을 전파한 과정은 지금도 그리스 신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과정을 그리스인들은 ‘강간’이라는 사건으로 은유한다. 그 신화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에우로파와 카드모스 신화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는 시돈 해안에서 꽃을 따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는 그녀의 미모와 순수함에 반해 욕정을 느끼고는, 흰 소로 변하여 그녀에게 다가간다. 에우로파를 바닷가로 유인한 제우스는 그녀를 등에 태우고는 바다에 뛰어든다. 겁에 질린 에우로파는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우스의 목을 끌어안는다.
크레타섬에 도착한 제우스는 에우로파를 강간한다. 에우로파는 크레타의 여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미노스는 크레타의 전설적인 왕이 된다. 유럽에 문명을 최초로 전해준 페니키아의 공주이자 크레타의 여왕 에우로파(Europa) 또는 에우로페(Europe)는 오늘날 ‘유럽’이라는 지명이 된다. 이 이야기는 비옥한 초승달의 문명이 크레타로 전파된 과정을 신화적으로 비유한다.
한편, 딸이 유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페니키아의 왕은 자신의 아들 5명에게 지중해 곳곳을 샅샅이 뒤져 에우로파를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참고로, 페니키아는 당시 지중해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해상국가였다. 다섯 왕자 중에서 그리스 지역 수색을 맡은 왕자가 바로 카드모스였다. 몇 개월 동안 그리스를 떠돌았음에도 에우로파를 찾지 못한 그는 절망 속에서 신탁을 받기로 한다. 그리스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쳤다. 미래를 예측하는 신의 뜻(점괘)이 바로 신탁(오라클; oracle)인데, 신탁은 대개 모호한 말로 되어 있어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어려웠다.
신탁은 카드모스에게 누이를 찾는 일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대신 암소 한 마리를 앞세우고 채찍질하여 계속 걷게하다가 암소가 지쳐 쓰러지면 그곳에서 암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그렇게 제사를 지낸 곳에서 카드모스는 강력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카드모스는 신탁을 그대로 따른다. 정말 암소가 쓰러져 죽었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곳은 바로 테베(Thebe)라는 곳이었다.
테베는 당시 무시무시한 뱀이 도시의 샘을 지키고 있어, 지역 주민들이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카드모스는 샘을 지키는 뱀과 결투를 벌였고, 마침내 뱀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사람들은 카드모스를 자신들의 왕으로 모신다. 죽은 뱀을 살펴보던 카드모스는 뱀의 이빨을 뽑아 들판에 심는다. 이빨을 심은 곳에서 용맹한 전사들이 나온다.
이 전사들은 카드모스를 호위하는 군대가 되었으며, 이 강력한 왕에게 올림포스의 신들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르모니아를 베필로 선물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로 여신과 결혼한 인간이 바로 카드모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드모스를 이처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땅에 심은 뱀의 이빨은 바로 알파벳을 상징한다. 페니키아인들이 발명한 알파벳을 그리스에 전해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신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은 바로 뱀이다. 바빌로니아의 창세 신화(에누마엘리시) 모티브가 유럽 문명의 탄생에서도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서양에서 문명이 전파되는 이야기에는 늘 뱀이 악역으로 등장한다.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꿈틀거리는 뱀은 여자의 성적인 에너지와 권력을 상징했다. 문명을 전파하는 남자 영웅들은 한결같이 신화 속에서 거대한 뱀(‘용’)을 처치한다.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케나아니(Kenaani) 또는 키나아니(Kinaani)라고 불렀다고 한다. 케나아니 또는 키나아니는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카나안(Canaan)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알파벳을 발명한 페니키아인은 바로 가나안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알파벳으로 기록한 최초의 문서가 바로 구약성서다. 페니키아인은 곧 구약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고대 히브리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구약에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티리언 퍼플의 전통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매우 귀한 티리언 퍼플로 염색한 옷을 입었다. 로마 시대에는 티리언 퍼플이 세분화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취하는 귀족들은 검은색에 가까운 티리언 퍼플(보라)을 주로 입었던 반면, 진보적인 노선을 취하는 귀족들은 빨간색에 가까운 티리언 퍼플(자주)을 주로 입으면서, 보라와 자주는 정치적 이념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 위에서 미국의 많은 대학들은 자주색을 상징색으로 삼고 있다. 가령, 시카고 대학은 티리언 퍼플과 피닉스를 자신들이 상징으로 삼고 있다. (페니키아의 후예?!)
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